본문 바로가기

SADI

sadi

 [한경비즈니스 1-1] 원대연 학장 - 패션업계의 박세리 키우겠다.

 

 

 

 

 

 

 

 

 

 

 

 

 

 

 

 

 불황의 늪이 깊다. 세밑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도 우울하기만 하다. 그러나 100% 행복, 100% 불행은 없다. 계곡이 깊으면 산이 높은 이치다. 세상 모든 이들이 힘들다고 해도 희망을 좇는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에 의해 세상은 밝아진다. 원대연(62) 한국패션협회 회장은 “패션은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이라며 패션사업의 세계화에서 한국경제의 희망을 찾는다. 원 회장은 1973년 삼성물산 봉제수출팀에 입사하면서 패션업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80년대 중반 줄곧 적자를 내던 에스에스패션을 100억 원대의 흑자 기업으로 변신시킨 것을 비롯해 제일모직을 국내 최고의 브랜드로 키워내면서 ‘해결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2004년부터 패션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삼성전자가 출자한 디자인 학교 SADI(Samsung Art & Design Institute) 학장을 겸하고 있다. 인터뷰는 지난 12월 17일 서울시 논현동 SADI 학장실에서 이뤄졌다.

 

패션산업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전통 제조업에서 미래형 첨단산업으로 재평가하는 분위기인데요.

“이제 섬유패션산업이라는 용어가 없어져야 해요. 섬유와 패션을 혼동해서는 곤란합니다. 섬유는 대량으로 생산하고 값이 저렴한데다 주문자생산방식(OEM)의 제조 중심 산업이에요. 그러나 패션은 IT, BT 같은 지식정보산업이자 선진국형 고부가가치 문화창조산업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예컨대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나 디자인은 유럽,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나옵니다.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세계적 브랜드가 탄생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가난할 때는 따뜻한 집에서 배불리 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만 소득이 상승하면서 삶의 질을 더 중시하게 됩니다. 패션 산업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돼지요. 다행스럽게도 최근 정부가 처음으로 패션산업을 미래 지식기반산업으로 발표하는 등 패션의 위상이 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한국패션의 글로벌 경쟁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프랑스, 이탈리아가 최고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 뒤를 미국, 영국, 스페인, 일본 등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한국은 그 다음 순서가 아닐까요. 최근 한국 디자이너들이 파리나 밀라노 등에서 패션쇼를 개최하는 등 적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진 글로벌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웃 나라인 일본의 경우 세계적 브랜드가 15개 정도 됩니다. 우리나라도 세계적 디자이너나 브랜드가 나온다면 한국패션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선이 달라질 것입니다.”

 

세계적 디자이너나 브랜드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골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제일모직 사장으로 재직할 때 일입니다. 당시 이건희 회장께서 ‘여자골프는 세계무대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박세리 선수를 세계적인 선수로 키워보라는 얘기를 하셨지요. 그래서 박 선수는 원래 일본진출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만 전략적으로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박 선수는 미국 진출 2년차에 US오픈 등 4개 대회를 석권하면서 엄청난 신드롬을 몰고 왔습니다. 당시 박 선수의 성공을 지켜보면서 수많은 소녀들이 골프채를 잡았고, 그들이 지금 미 LPGA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패션도 월드 디자이너나 월드 브랜드가 탄생하면 제2, 제3의 성공스토리가 쏟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박 선수의 성공에서 얻은 교훈은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구슬을 꿸 수 있는 강력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아무래도 기업들이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키운다는 독지가의 마음으로 도움을 줘야 합니다.”

 

정부와 기업의 노력은 물론이고 대학 교육이 뒷받침돼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은 대학들이 패션 디자인 관련학과를 두고 있습니다만 한국 디자인의 수준이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우리 대학교육이 어떻게 변해야 될까요.

“교육 문제는 참 복잡합니다. 우선 부모의 사고방식이 변해야 되지 않을까요. 부모의 이기주의가 너무 심해요. 자녀의 적성과 장래성을 먼저 따지고 밀어줘야지요. 그런데 현실은 반대예요. 그저 시험 잘 치는 기계로 만들고 있습니다. 대학교육도 혁신해야 합니다. 디자인 전공 학생들의 취업률은 절반도 안 됩니다. 교육이 부실한 탓에 기업에서 재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일을 못해요. 그림 잘 그리는 것은 기본입니다. 사회 문화적 요소를 감안해서 고객이 원하는 바를 창의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디자인입니다. 여기다가 생산시장의 흐름과 마케팅 측면을 읽을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해요.”

 

SADI는 어떻습니까.

“SADI는 철저하게 과제중심 교육을 지향합니다. 학생들에게 과제를 부여하고 발표하게 합니다. 한 명씩 발표하면서 학생들이 토론하고 교수는 마지막에 조언하는 방식입니다. 100명의 아이디어가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창의성 교육입니다. 졸업생들은 기업에서 재교육 없이 실무에 투입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게 됩니다.”

 

학위도 없는데 우수 학생을 유치할 수 있나요.

“초기에는 신입생의 100%가 고졸 출신이었어요. 지금은 입학생의 65%가 대학 재학 중이거나 대졸자, 직장인들입니다. 정말 디자인이 하고 싶어 오는 학생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지요. 자연스레 학위 문제는 뒷전으로 밀렸습니다. 교육은 철저하게 시킵니다. 100명이 입학해서 졸업하는 학생은 50명에 불과해요. 불량품을 양산해서는 명품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실력이 떨어지면 가차 없이 제적하거나 유급시킵니다. 이러다보니 세계적인 어워드에서 수상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패션의 매력은 무엇입니까.

“패션은 삶의 질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요. 더구나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기 때문에 패션산업이 발달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췄어요. 직장에서 여러 분야의 일을 했지만 패션이 가장 재미있었어요. 치밀한 시장조사 끝에 내놓은 제품이 잘 팔리면 그리 기쁠 수가 없어요. 패션을 맡고 난 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불황의 늪이 깊습니다. 2008년 패션업계는 어땠나요.

“다른 산업도 마찬가지겠지만 너무나 어려운 한 해였어요. 한국의 패션산업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성장세를 지속했어요. 그러다가 2005년부터 과잉투자 등으로 침체기에 접어들었는데 이번에 직격탄을 맞은 셈입니다. 2009년엔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다만 스포츠나 레저 웨어는 그나마 선전이 예상됩니다.”

 

새해 계획을 말씀해주시죠.

“패션협회는 세계적 디자이너와 브랜드를 만드는 일에 전력 투구할 것입니다. 정부에서도 문화산업으로 키우겠다며 관련 예산도 편성하고 있어 전반적인 분위기는 좋을 것 같습니다. 경기도 이천에 물류단지를 조성하고, 충북 충주에 생산단지를 건설하는 사업도 중요합니다. 패션 업체들이 어려운 경영환경을 어떻게 뚫고 나갈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헤쳐 나갈 것입니다.

SADI에서도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SADI를 학교다운 학교로 만들지 못하면 대한민국에 희망이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SADI의 성공사례가 우리 교육의 방향타를 설정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힘을 쏟을 작정입니다.”